당신이 그 사람이라

2014.08.24 | 정존수 목사
삼하 12:7-15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가 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였고, 의학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으며, 심지어 음악적인 재능도 뛰어나서 오르간 연주로 명성이 있던 사람입니다. 이처럼 뛰어난 슈바이처가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친구와 싸움을 했는데, 상대가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운 아주 가난한 집 아이였습니다. 결과는 슈바이처가 아이를 깔아뭉개고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슈바이처가 승리감에 취해 있을 때, 밑에 깔려 있는 아이가 말했습니다. “나도 너처럼 고기를 먹을 수 있다면, 너를 이길 수 있어” 이 말이 슈바이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또 한 가지는 어느 날 슈바이처가 공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한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조각상은 흑인 노예가 백인 주인의 발을 닦아주고 있는 조각상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어린 슈바이처의 마음에 남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그는 주변에 고통스러운 이웃들을 외면하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남들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사건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는데 무엇보다 자신을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를 새롭게 볼 수 있을 때, 가치가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 왕의 일생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 사건은 밧세바 사건입니다. 즉, 다윗 왕이 밧세바란 여인을 좋아한 나머지 그녀를 범하였습니다. 그리고 밧세바가 자기 부하 우리야의 아내인 것을 알자, 우리야를 전장에 내 보내 죽게 하였습니다. 그는 천인공로 할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 죄에 대해 말하지 않을 때, 나단 선지자가 와서 그의 죄를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을 가지고 볼 것을 바로 봄으로 참된 변화로 나아가는 몇 가지 비결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나는 아니겠지’의 껍질을 벗어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대인관계에서 가장 답답하고 안타까운 경우는 다른 사람은 다 아는 잘못이나 실수를 본인은 모를 때입니다. 자기를 못 보는 원인은 ‘나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옳기에 잘못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이 자신을 바르게 보지 못하도록 만들고 타인에게 큰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찾아왔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파렴치한 죄를 저지른 다윗에게 와서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 한 마을에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자여서 양과 소가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너무 가난하여 가축이라고는 암양 새끼 한 마리뿐입니다. 이 가난한 사람에게 암양 새끼는 얼마나 귀한지, 마치 딸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한 나그네가 부자의 집에 와서 대접하려는데, 자기 집에 있는 양과 소를 잡지 않고 그 가난한 자의 양 새끼를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들려준 이야기는 다윗을 염두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 가운데 암양 새끼 한 마리를 가진 사람은 다윗의 부하 ‘우리아’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의 양 새끼를 빼앗은 부자는 바로 다윗입니다.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 이건 내 얘기구나’하고 자기 죄가 생각이 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다윗이 보인 반응은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지라(삼하12:5)”고 말합니다. 무지하게 자기인줄 모르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인데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다윗 같은 영적인 사람도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 주시고, 말씀을 주시는데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은혜 받고, 아멘하면서도 놓칠 수 있는 것이 ‘나는 아니겠지’라는 생각입니다. “나는 아니겠지, 이 말씀은 내가 아닌 아무개를 위한 말씀이네”라는 생각이 우리를 미숙하게 만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야 참된 변화를 가져옵니다.

다윗을 향하신 하나님의 불같은 책망이 나단을 통해 전달됩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겨 이같이 악을 행했느냐? 네가 어찌하여 나를 업신여겨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우리아를 죽였느냐?” 정신을 차릴 수 없게 책망과 저주가 쏟아집니다. 일개 선지자가 한 나라의 왕에게 면전에서 전하는 메시지치고는 직설적이고 끔찍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다윗은 선지자의 모든 책망과 저주를 달게 듣습니다. 다윗은 어떤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이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윗은 나단의 책망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을 때,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럼으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야 하고, 모임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야 합니다. 누구를 만나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무엇을 들어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은혜가 없으면 무엇을 들어도 사람의 말로만 들립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날마다 새로워지고 참된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3. 나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참된 변화를 이룹니다.

다윗이 나단을 통한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을 듣고 난 후에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발가벗겨졌습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 추하고 더러운 지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나단이 “당신이 그 사람이라”말했을 때, 자신의 죄된 모습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끄러운 자신을 똑바로 직면했습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삼하12:13)” 이것이 우리 안에 내면의 문제와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세상은 우리 안의 문제를 자꾸 덮게 합니다. 하지만 죄의 문제, 내면의 문제는 덮으면 덮을수록 강해져서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 빈치는 그림을 구상하면서 가롯 유다를 어떻게 그릴까 생각하다가 자기가 제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고 했는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려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생각하는데 문득 자기가 미워한 친구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친구를 미워한 죄가 떨쳐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한동안 고민한 다 빈치는 결심을 하고 그 친구를 찾아가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내가 실상은 자네의 얼굴로 가롯 유다 얼굴을 그렸는데, 그게 자꾸 마음에 걸려 이렇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왔네” 놀랍게도 용서를 빈 이후에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삶에 예수님이 그려지기를 원합니까? 먼저 우리 안에 용서와 화해가 있어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 없이는 예수님이 내 삶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윗처럼 죄를 인정하고 직면할 때, 회복과 변화와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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